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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영상예술에 대하여...

by 서풍광시곡 2020. 4. 28.


(1) 세 가지 기술적 영상 미디어의 특성

  영상미디어의 특성은 그림, 사진, 그래픽 등 화상이나 도상에는 없는 이미지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멀티미디어는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적 체계이자 공적으로 공중에게 수용되는 공공 제도이며, 문화생산 또는 대상화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즉, 담론과정으로 정의된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영상미디어의 특징은 기계에 의한 탄생, 카메라의 눈에 의한 결정, 틀에 의한 메시지화, 움직임에 의한 가치화, 재생단계에서 완성, 빛의 의해 생명을 가짐, 복제가능, 판매저작권을 갖고 배급. 유통 등의 특징을 가진다.
  특히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기술발전으로 영상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및 문화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산업적. 경제적 의미를 띠고 있다. 즉 21세기 정보. 문화시대를 주도할 산업영역이 바로 영상미디어다. 따라서 영상미디어는 문화산업으로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또한 영상미디어가 갖는 복제성, 기술성, 동시성, 대중성 등으로 시너지 효과 즉 창구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 영상제작물을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게임 등 다차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영상미디어가 갖는 이러한 위력은 산업적.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공중의 매체이용행태에서도 나타난다. 즉 과거 인쇄매체가 ‘수용’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영상매체의 ‘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미 일상의 여가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초기영화의 발전과 세 명의 영화인, 뤼미에르, 멜리에스 그리고 포터에 대하여

초기 영화의 발전
- 1910년대 중반 무렵 어엿한 산업으로 확립, 엄청난 변화를 겪음
⇒1970·80년대 이전의 영화사가 들은『조잡하다』라는 이유로 이 시기 영화들을 <할리우드 이전>, <고전 이전>, <그리피스 이전> 영화로 한데 묶어 홀대
- 영화가 「영화 언어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피스(David W. Griffith)의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1915), (1916)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한 것처럼 여김 
→ 대단한 착각·무지로 판명: 영화 텍스트 자체는 물론 제작·상영·수용 방식 및 재현 양식·소재·이데올로기 등 모든 면에서 뒷날의 영화들과 근본적 차이를 갖는다
- 이 시기 상상 이상의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함

뤼미에르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 ·흥행 ·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 형 오귀스트(Auguste:1862∼1954)와 아우 루이(Louis:1864∼1948) 형제는 사진가의 아들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연구, 필름이 원활히 움직이는 장치를 완성하여 촬영기와 영사기를 만들었다. 1895년 시네마토그라프 뤼미에르의 특허를 받아, 이 기계로 촬영한 영화를 일반에게 유료 공개하였다. 작품은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 출구(出口)》《열차 도착》《물고기를 낚는 아기》《바다》 등 각각 필름 길이 십여m 정도의 영화로 상영시간은 1분도 안 되었다. 실업가로서의 수완과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했던 형제는 실사영화(實寫映畵)가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흥행이 벽에 부딪치자 2년 뒤 영화에서 손을 떼고 평생을 컬러 사진 및 입체 사진 연구에 몰두하였다. 

멜리에스
  파리 출생. 아마추어극에 열중한 취미인이었다. 특히 요술을 좋아하여 로베르우댕극장이라는 만담 흥행극장을 스스로 꾸려나갔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하자(1895), 즉시 카메라를 구입하여 촬영을 배워 단편물을 만들다가 1896년 M.브와가 만든 세계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기획 ·각본 ·장치를 도맡아 이른바 트릭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포터 에드윈 포터

- 이중 행동선, 교차 편집
- <미국 소방수의 생활>(1903), <대열차 강도>(1903)

(3) 사실주의에 대하여 오손 웰스의 영화 <시민케인>의 예

  <시민 케인, 1941>에 대해 글을 쓰려면 영화 예술에 관한 글을 써야 한다. 영화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 영화를 생각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손 웰스 자신은 헐리우드와 그다지 행복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은연중에 그를 미국 서술체 영화의 구조 속에서 파악해왔다. 폴린 카엘(Pauline Kael) 은 1930년대의 언론 영화를 논하면서 헐리우드 골수파 언론인이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을지도 모를 유일한 인물인 맨키위츠(Mankiewicz)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찰스 하이엠( Charles Higham)은 ‘철저히 미국적인 작품’을,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는 ‘미국식 바로크(baroque)'를 얘기하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영화에 관한 한 미국 = 헐리우드라는 공식을 확신하는 듯싶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노엘 버치같은 헐리우드의 적들은 웰스를 일리아 카잔(Elia Kazan), 로버트 올드리치(Robert Aldrich), 조셉 로지(Joseph Losey), 아더 펜(Arthur Penn)과 연관짓고, 단순히 전통적 서술 방식의 확대판을 내놓았을 뿐 혁신하지는 못했다고 [시민 케인]을 비난한다. 이런 주류의 흐름에 우리는 앙드레 바쟁의 막대한 영향을 대치시켜야 한다. 바쟁의 관점에서라면 <시민 케인>과 <위대한 앰버슨가 사람들, 1942>은 사실주의라는 영화의 소명을 천명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장 르누아르와 윌리엄 와일러의 작품과 함께 웰스의 <시민 케인>은 루이 푀이야드, 에릭 폰 스트로하임, F. W. 무르나우의 무성 영화 시대 이래 사라졌던 사실주의 전통의 재발견을 의미했다. <시민 케인>은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2)에 대해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바쟁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그의 관심은 자성 테이프와 가벼운 녹음기와 촬영기, 그리고 필름 잇기3)의 발명으로 인한 기록 영화의 새로운 발전과 시네마 베리테(cinéma verité) 쪽으로 기울었을 터이다. (기술에 대한 절대적 신념은 틀림없이 바쟁의 생각을 이 방향으로 이끌었으리라.) 물론 바쟁에게는 <시민 케인>의 결정적인 특징이 딥 포커스4)와 롱 테이크5) 기법이었다. 그렇지만 웰스에 관한 바쟁의 글에서 우리는 정신적인 겸손함과 자신을 제거하려는 자세뿐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인위성도 앞지르는 의미를 지닌 현실 앞에서 보여주는 예술가의 자제력, 그러니까 바쟁이 ’표현양식이 없는 표현양식‘의 특성이라고 간주했던 민주적인 의식조차도 웰스가 별로 함께 나누지 않는다는 데 대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항상 의식하게 된다. 관객의 눈앞에서 새총처럼 되튀면서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같은‘ 웰스의 공간, 그리고 그의 ’가학성(Sadism)'에 대해 바쟁이 가끔 언급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기 쉽다. 바쟁은 웰스를 (딥 포커스의 대가였던 플랑드르 화가들뿐 아니라) 엘 그레꼬(El Greco)에 비유했고, 그가 보여준 ‘지옥의 시각’과 ‘폭군의 객관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표현양식을 섬기고 조작하는 사람이라고 웰스를 파악한 이런 인식은 바쟁을 주요한 논점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바쟁은 웰스와 그렉 톨랜드(Gregg Toland, <시민 케인>의 촬영감독)가 대가다운 솜씨로 선보인 딥 포커스 촬영 기법에 열광했다. 웰스가 영화 역사에서 차지한 위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한다.
  이때의 사실주의란 추상예술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미술 ·문학에서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A.콩트가 주창한 실증주의의 영향과 함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예술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4) 자기반영주의에 대하여 임권택의 영화 <취화선>의 예

  조선 후기의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임권 
택 감독이 연출하고 최민식·안성기·유호정 등이 출연하였다. 각본은 임권택·김용옥이 함께 
썼고, 촬영은 정일성, 음악은 김영동이 담당하였다. 2002년 5월 26일 제55회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칸영화제 장편 경쟁부문 수상
작이 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세속적인 삶을 초월한 천재화가를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이라고 표현하여 취화선이라고 붙인 것이다. 
  이 영화는 19세기의 천재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아름다운 영상에 담은 작품으로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연출작이다. 장승업은 한국 근대회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 넘치는 작품을 남겼다. 영화는 일본,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등 서
구 열강의 침략 속에 비극적으로 몰락해 가는 조선 왕조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른 천재화가의 불꽃 같은 삶을 그려내고 있다.
  자기반영주의란 영화를 포함한 예술매체가 객관적인 외부세계가 아닌 영화와 관련된 내부
세계를 재현한다는 입장이다. 영화에서 영화자체, 혹은 창작상황이나 수용상황이 묘사되는 
경우를 말한다.

(5) 영화예술에서 작가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하여

  작가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진 작품들을 작가주의 작품이라고 부른다.개인적 창작력과 창의성 부여,특수성 강조,개별감독에 대한 공통된 특징,감독이 작가적을 드러내는 특별한 스타일이다.
  그들은 시류나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고집한다. 보통 영화에서 많이 쓰이고 (아마 쓰이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어째 유행처럼 여기저기에 많이 갖다 붙여진다.
  작가주의라는 개념은 프랑소와 트뤼포가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등장한다. 이 글에서 트뤼포는 당시에 단지 장인수준에 머물렀던 프랑스 일부 감독들 예를 들면 르느와르, 브레송, 막스 오풀스, 장 콕도 등과 같은 감독들을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헐리우드에서 B급영화를 찍던 감독들을 '재발견'하게 되면서 그들을 작가라고 부르게 된다. 대표적인 감독이 앨프레도 히치콕, 존 포드 등이다. 지금은 모두 대감독의 반열에 오른 감독들이지만 당시엔 그저 영화를 잘 찍는 사람들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아마 작가주의 비평가들(트뤼포말고도 장 뤽 고다르, 샤브롤 등이 있다.)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바로 이런 감독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거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이 연출한 세편 이상의 영화, 영화에 대한 비평, 인터뷰, 회고록, 평전 등을 자료로 해 감독이 보여주는 주제, 양식 등을 검토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 배역, 조명, 음악, 편집 등의 모든 영화의 요소에 감독의 개성이 충분히 반영되었는가", "미장센 등의 영화 스타일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나타냈는가"이다. 한편 작가주의 이론은 감독의 주도권을 너무 맹신하는게 아니냐, 감독 의 편협한 개성을 숭배하는 결과를 낳는 게 아니냐는 등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상업 영화시스템이 강요하는 제약 속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창의적 작가로 남는 것. 이것은 타락한 상업영화를 구제하는 유일한 방부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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