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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데카르트(Descartes)와 방법서설

by 서풍광시곡 2020. 4. 1.

데카르트(Descartes)와 방법서설



  데카르트(Descartes)는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정초를 닦았다. 그는 보통의 회의가 아닌, 방법적론적 회의를 거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선언하여 철학의 출발점이자 기본원리를 형성했는데, 17세기 전체에 걸친 과학사상은 데카르트(Descartes)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데카르트(Descartes)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으며, 그를 위해 택한 방법이 진리가 습득되는 원리를 검토함으로써,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체계적인 의심의 방법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한 가지씩 의심하고 부정했다. 그는 ‘꿈의 가설’을 주장하며 감각에 의해 습득된 인간의 지식은 정확하다 할 수 없으므로 의심하고 부정하였다. 또한 그는 명증성이 뛰어난 수학적 진리마저 악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부정했고, 자신의 생각속의 관념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한다. 더욱이 그는 어떠한 외부의 존재도 의심하고 부정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포함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의 존재와 그 유일성, 완전성을 증명했고, 신의 존재를 통해 다시 외부의 존재 및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이를 포함한 우주 전체에 대한 체계질서를 정립했다.
  이러한 방법과 과정이 바로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방법서설」은 총 6부로 구성되어있으며, 제1부는 학문에 관한 다양한 고찰로서 전통적인 학문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데카르트(Descartes)가 찾아낸 학문방법의 주요규칙에 대해서 다루며, 제3부에서는 이 방법으로부터 이끌어낸 도덕규칙을 다룬다. 제4부에서는 형이상학의 기초로 신과 영혼의 존재를 다루고, 제5부에서는 물리학에서 데카르트(Descartes)가 탐구했던 일련의 문제처럼 자연학의 문제들에 대해서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제6부에서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더욱 진전하기 위해 요구된다고 데카르트(Descartes)가 믿는 몇 가지 사항들과 책을 집필한 이유에 대해서 다룬다. 데카르트(Descartes)는 17세기 대륙합리론을 지지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방법서설」은 합리론적인 성격을 많이 띠고 있다. 합리론이란 비합리적이고 우연적인 것들, 즉 경험적인 것들을 배척하고 이성에 의한 방법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는 루크, 흄, 베이컨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경험에 의해서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과 대비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철학뿐만 아니라 자연학, 수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수학에서는 기하학에 대수학적인 성격을 부과한 해석 기하학을 만들어낸 업적이 있다. 「방법서설」에서도 수학자로서 데카르트(Descartes)의 면모가 많이 보이는데, 그의 방법에 대해 논하는 부분에서 대수학의 특징인 분석적인 방식과 기하학의 특징인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방법서설」의 특징은 우화로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훈을 주고자하는 자의 적은 실수도 비난의 여지가 있으며, 받아들이는 이에게 해가 될 수 있지만 우화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우화는 본보기로서 하나의 모방의 대상이 될 것이며, 모두를 따르기 보다는 자신에게 적합한 것은 추종하며 그렇지 않은 부분은 추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방법서설」을 대할 때, 소박한 이야기나 우화정도로 생각하고 받아 들이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제1부 학문들에 대한 고찰

  1부에 해당하는 내용은 방법의 중요성, 우화의 형식으로 작성된 이유, 마지막으로 대학에서의 학문을 뒤로 한 채 세상을 통해 진리를 얻으려 향한 이유로 구성되어 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기본적으로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양식과 같은 능력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주어져있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전개한다. 양식이란 이성과 같은 말로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양식 또는 이성이라고 부르는 고유한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평등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평등한 이성 앞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다양성을 보이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다른사람보다 더 이성적이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방식이나 고찰대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정신 자체를 갖는 것보다 이 정신을 잘 사용하고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 정신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덕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성의 소유여부가 아니라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이성을 잘 사용하기 위해 자신이 겪어왔던 수많은 기존 학문들에 대해 고찰을 해본다. 그 결과 학문들 나름의 장점이 있기는 하나 이성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학문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기존 학문들이 모두 확실한 근거에서 출발하지 않아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무수한 논쟁만을 만들어낼 뿐 논쟁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실하고 명확한 근거에서 출발하지 않은 학문은 모두 부정의 대상이 되고 단 하나의 학문만이 살아남는데, 그것이 바로 수학이다. 수학은 확실성과 명증성을 전제로 하며, 토대가 굳건하고 공건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진리탐구의 기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 데카르트(Descartes)는 스스로의 본보기와 관습을 통해 설득된 것을 맹신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이성의 작용을 흐리게 하는 오류로부터 해방되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방법서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성을 잘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단지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의 경우를 이야기 하면서, 이성을 어떤 방법으로 지도하려고 해왔는지에 대해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방법서설」은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성격의 글이 아닌 일종의 자서전같은 우화로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으면서 어떤 이들에게는 유용한 글, 즉 반드시 따라야 하는 글이 아니라 권고하고 추천의 성격의 글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1부에서의 우화로 제시되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야기는 어렸을 때의 데카르트(Descartes)의 생애부터 시작해서 학문에 회의감이 든 이유까지이다. 어렸을 때는 삶에 유용한 모든 것에 관한 명석하고 확실한 지식을 학문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배움의 결과는 자신이 의심과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이었다. 또한 배우는 과정에서는 학문에 대해서 일종의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배움에 따라 그 학문이 지니는 한계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배우고자하는 의지는 자신의 무지함을 더 일깨워 주었고, 하나의 참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의견이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데카르트(Descartes)는 배우기를 열망하게 했던 가르침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매우 유용한 많은 가르침과 덕이 담겨져 있는 도덕을 다루는 책들도 덕들을 깨닫기에 충분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으며 이들이 덕이라는 미명하에 이해하는 것들은 흔히 무정함이나 교만, 좌절, 부친살해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와 같이 학교에서의 배움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데카르트(Descartes)는 학교 보다는 세상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였고, 젊은 시절을 여행으로 보내고자 결심하게 된다. 이후 데카르트(Descartes)는 세상이라는 책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이성의 힘으로 진리를 탐구한다.

제2부 방법의 주요 규칙들

  제2부에서는 방법의 규칙들이 제시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젊었을 때 철학의 여러분야 중 논리학을, 수학에서는 분석기하와 대수를 약간씩 공부했었다. 데카르트(Descartes)에 있어서 논리학은 참되고 좋은 가르침이 많이 담겨져 있지만,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진위 판단 없이 말하는데에 적합한 학문이다. 분석기하나 대수는 추상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고 도대체 아무 쓸모도 없는것 같아 보이며, 특히 분석기하는 늘 도형을 고려하게 되어있어서 지성의 사용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많이 지치게 한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Descartes)는 이 세 학문들 각각의 이점은 갖고 있으면서도 그 결함들로부터는 면제된 다른 방법을 찾고자했다. 그리고 찾은 것이 바로 네 가지의 방법규칙이다.
  첫 번째, 결코 진리라고 명증하게 인식하지 않은 것은 하나라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솔함과 편견을 조심스레 피하여, 다른 기회가 와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정신에 명증하고 판명하게 나타나는 것만을 자신의 판단에 포함하라는 것이다. 이 규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증과 판명이다. 왜냐하면 명증함과 판명함이 전제되어야 지식들이 자신의 판단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증은 명백한 증거, 간접적인 추리에 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진리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직관적으로 진리임을 인지할 수 없거나, 그것이 진리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직관적으로 진리임을 알기위해선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불변하는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 명증함속에는 진리의 동일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판명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는 애매모호한 것들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검토 대상인 각각의 난문을 더욱 잘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한 부분들로 필요한 만큼 나누라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서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치 화학에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작은 부분인 원자로부터 검토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 생각을 질서 있게 지도하라는 것이다. 즉 가장 단순하고 인식하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점진적으로 가장 복합적인 것들에 관한 인식에 도달하라, 그리고 자연적으로는 서로서로 전혀 앞선다거나 뒤선다거나 하지 않는 것들 중에라도 이러한 선후 질서를 상정하라는 것이다. 이 규칙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으로부터 복합적인 것까지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계단을 순차적으로 한 단계씩 오르듯이 과학적인 탐구에서도 과정을 한 단계씩 밟아 나가면서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이 규칙은 데카르트(Descartes)가 기하학에서 매우 어려운 증명을 행할 때 항상 가장 단순하고 쉬운 추론의 긴 연쇄가 사용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만든 규칙이다.
  네 번째,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확실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완전하게 열거하고 아주 일반적으로 검토하라는 것이다. 완전한 열거와 검토가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네 가지 지침의 핵심을 정리해보자면 명증성, 분석, 체계적순서, 완전한 검토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이 규칙들을 통해서 세 가지 학문(논리학, 분석기하, 대수)들이 적용되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앞서 발견한 진리를 나중에 다른 진리를 발견하는데 사용하면서, 정말 어렵다고 판단했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했을뿐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답을 모르는 문제도 어떤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해결 할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데카르트(Descartes)가 이 방법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이성 모두를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능력에 닿는 최선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학문의 난문들을 이와같은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던 중, 데카르트(Descartes)는 철학에 문제를 발견한다. 학문의 원리들이 철학에서 차용되었지만, 철학에 확실한 아무것도 발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철학에 확실한 것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태 받아들였던 모든 그릇된 의견을 마음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고, 스스로 처방한 방법은 연습하면서 추론에 필요한 경험을 쌓으면 이 방법을 더욱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제3부 몇 가지 도덕 격률들

  제3장에서는 데카르트(Descartes)가 만든 네 가지의 격률에 대해서 소개한다. 격률이란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써의 도덕적 규범을 뜻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이성이 자신에게 아무런 단호한 판단도 내리지 말 것을 강요하는 기간동안 단호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또한 계속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당분간의 삶의 방침을 마련했고, 그것이 바로 격률이다.
  첫 번째, 내 조국의 법과 관습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즉 신앙의 문제에서는 신의 은총 덕택에 내가 어릴 적부터 배워온 종교에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고, 여타의 문제에서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 가장 좋은 판단력을 갖춘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가장 온건하고 가장 덜 극단적인 의견을 따르라는 것이다. 온건한 의견은 실천하기에도 가장 편하거니와 무릇 모든 지나침은 나쁘기 마련이므로 가장 온건한 의견이 가장 좋은 의견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극단적인 의견이 옳은 의견이어서 이 의견을 선택해야 했지만, 그만 잘못 판단하여 이 의견을 택하지 않은 경우를 대비해서이다.
  두 번째, 가능한 한 최대로 단호하게 행동하고, 만약 가장 의심스러운 의견일지라도 일단 따르기로 결정된 다음에는 진짜 확실한 의견을 따르는 것에 못지 않게 한결같이 따르라는 것이다. 이는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만히 머물러 있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대신 늘 가능한 한 가장 곧게 한쪽 길로만 걸어가는 여행자들의 예를 모방한 것이다. 이들의 선택이 우연적일지라도 다른 사소한 이유만으로는 절대 경로를 바꾸지 않는다. 비록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숲의 어느 끝에 도달할 것이고, 이는 숲 한가운데에 남아서 우왕좌왕 하는것 보다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동에서도 지체가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참된 의견을 가려내는 것이 우리의 능력을 벗어날 경우, 가장 개연적인 의견을 따라야하며 어떤 의견이 개연적인지 알 수 없더라도 무슨 의견이든지 따르기로 결정한 다음에는 이 의견을 의심없이 매우 참되고 확실한 것으로 간주해야한다. 이 격률은 지금은 좋다고 행하는 것을 나중에는 나쁘다고 판단하곤 하는 나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모든 후회와 통한에서 데카르트(Descartes)를 구제하기에 충분했다.
  세 번째, 늘 운명보다는 나 자신을 정복하고자 하며, 세상의 질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나 자신의 욕구를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의 생각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내 힘을 벗어나 있다고 믿는 데에 스스로 익숙해져서 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얻지 못한 외부의 것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끔 되라는 것이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에 도달하려는 욕구를 전혀 갖지 않게 해주고, 자신의 역량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해준다. 이러한 역량범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과 자주 반복되는 성찰이 필요하다. 철학자들의 경우 자신에게 처방된 자연적인 한계를 끊임없이 고려한 결과 오직 생각만이 자신의 힘 안에 있다고 스스로에게 완전히 확신시켰고, 이는 생각 이외의 다른 것들에 아무런 애착도 갖지 않도록 하는데 충분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를 더욱 부유하고 더욱 유능하고 더욱 자유롭고 더욱 행복하다가 평가했던 것이다.
  네 번째, 결론으로 가장 좋은 직업을 택하기 위해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온갖 직업을 한번 훑어보라고 충고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남들의 직업에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가장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게 스스로가 생각하는 천직이라는 것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내내 만족했으며, 그 누구도 삶에서 이보다 달콤하고 순수한 것을 맛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을 느꼈다. 이렇게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의 격률들에 대해 확신하고, 격률들을 신앙의 진리들과 한편에 놓고 난 다음 자신의 모든 의견들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오류를 떨쳐버리는 것 자체의 근원은 의심이지만, 회의주의자와는 반대로 단지 스스로 확신을 얻는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이 회의주의자를 모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데카르트(Descartes)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검토 대상이었던 의견들의 허위나 불확실성을 허술한 추측이 아닌 명석하고 확실한 추론을 통해서 발견하고자 했고, 충분하게 확실한 결론을 끌어낼 수 없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의견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격률에 의거해 살면서 데카르트(Descartes)는 계획을 추구하고, 진리의 인식을 증진시켜나갔다.

제4부 형이상학의 토대

  데카르트(Descartes) 사유의 근본적 원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러한 명제를 도출하기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를 사용했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의적 방법을 통해 제일원리를 찾기 위해서는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로 그는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의심하고 부정했다. 다음은 데카르트(Descartes)의 ‘꿈의 가설’이다.

   “내가 감각하는 사물들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혹시 이것들이 상상의 산물은 아닌지, 내가 꿈을 꾸고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감각을 넘어서 물리적 대상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데카르트(Descartes)는 ‘꿈의 가설’을 통해 우리의 감각적 지식들이 한순간의 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했으며,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었기에 감각적 지식의 불확실성은 감각적 지식을 부정하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 데카르트(Descartes)는 제1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수학적 지식도 의심한다. 데카르트(Descartes)에 의하면 우리는 “1+1=2”라는 사실을 아주 당연하게 알고 있는데, 이는 악신이 우리가 판단의 오류를 범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Descartes)는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문제에 있어서조차 추리를 잘못하여 오류 추리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전에 증명으로 인정했던 모든 근거를 거짓된 것으로 던져 버렸다.”라고 말하면서, 수학의 명제나 공식을 의심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수학적인 추론, 증명마저도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그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이 때 참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꿈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인격적 자아, 신체적 주체, 몸과 마음의 결합체가 아닌 생각의 주체라는 점에서 반성능력과 내적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회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데카르트(Descartes)는 ‘나’를 회의하기 이전에 앞서 ‘생각’을 회의해보기로 한다. 생각은 관념, 판단, 의지, 정서로 나뉠 수 있는데, 생각중에 관념이 차지하는 부분이 가장 크며 기본이 된다. 결국 관념이라는 개념만이 회의 불가능한체로 남게되며, 이는 바로 신이 된다. 인간은 완전관념을 갖고 있으나, 인간과 같은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관념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선 외부의 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관념을 받아야 하므로, 완전관념의 근원으로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데카르트(Descartes)는 신의 존재 증명을 하게 되고, 신의 존재를 통해 수학적지식과 그 외 일부 진리들을 다시 복권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데카르트(Descartes)는 신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방법적 회의로부터 자유로운 사유로 나가는 길을 제시하였다.

제5부 자연학적 문제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영역들은 아직 남아 있지만 이것들에 대해서 연역하면 학자들 간의 논쟁이 일어날 것이기에 데카르트(Descartes)는 그 문제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그 문제들은 물질적 사물들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며, 빛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빛은 항성에서 나오고, 항성의 빛은 천공을 통해 전달되고, 유성 및 지구, 그리고 지상의 사물들이 빛깔이 있고,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하느님이 상상적 공간 속에 어디엔가 지금 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물질을 창조하고 그가 세운 법칙을 따라 자연이 움직이게 한다고 가정할 때,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날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하느님과 정신에 관하여 말한 것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려고 했고,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과 하느님이 여러 세계를 창조했어도 그 법칙은 동일하게 지켜지는 것임을 밝히려고 했다. 또한 혼돈한 물질을 통해서 어떻게 하늘이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지구가 형성되고, 항성들과 빛이 만들어지는지도 설명하려고 했다. 
  하느님이 인간의 신체를 지었다고 상정할 때, 그가 인체의 심장 속에 빛 없는 불을 켜 주었다. 이 불은 요리를 할 때 쓰는 불과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인간들 속에 있을 수 있는 기능들을 모두 발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는 기능들이었으며, 오직 이성적 정신이 신체에 결합된 형태만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기능들이었다. 이 기능들을 살펴보았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거나 의문이 생긴다면, 폐를 가지고 있는 어떤 큰 동물의 심장을 자기 눈 앞에서 절개시켜 볼 것을 권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점에서 사람의 심장을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수학적이며 기하학적인 판명한 원리가 있음을 주시한다. 즉 모든 동물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자연학을 주장했다. 동물 정기가 신체의 내부에 있으면서 신체의 부분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의 신경들과 근육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하는가? 이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장소인 공통감각을 어떤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관념들을 보존하는 기억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자연의 원숭이와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기계, 자연의 인간과 그것을 흉내내는 기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이, 인식 방법이 자연학에 허용되고 모든 동물은 기계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에 입각한 데카르트(Descartes)의 생각이었다. 
  다음으로 데카르트(Descartes)는 이성을 인도하는 법칙은 물체의 모든 영역에 적용가능하다고 봤다. 이성은 결코 물질의 힘에서 끌어내어질 수는 없고, 특별히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감각과 욕망들을 가지며 하나의 참된 인간을 형성하는 데는 좀 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영혼의 존재장소, 방식을 말하진 않는다. 결국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여 남는다면 그 영혼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는 곳 역사이다. 역사는 인간의 영혼이 거주하는 현재인 것이다.

제6부 자연탐구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 및 이 책의 집필 동기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의 정신에서 나온 것을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여겨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나 자연학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 원리를 획득하고 이것들을 갖가지 특수한 문제에 적용해 보기 시작하면서, 그것들을 숨겨둘 수 없고, 만일 숨겨둔다면 율법을 크게 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만약 단명이나 실험의 부족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면 자신이 발견한 것이 극히 적을지라도 그 전부를 충실하게 대중에게 알리고, 우수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쓰게 하고,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애와 업적을 합침으로써 우리들 각자가 따로따로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우리 모두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제일 좋은 대책이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실험에 관하여 그가 따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세계 안에 있는 혹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들, 즉 제 1원인들을 일반적으로 찾으려 하였고, 이렇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만을 고찰하며 또 그 원리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본래부터 있는 진리의 어떤 씨앗으로부터만 끌어내었다. 이것 다음에, 그는 이 원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하늘, 별, 빛, 지구 등의 대상은 그 결과였고, 좀 더 특수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했을 때는 갖가지 특수한 실험들이 요구되었다. 이것 다음에는 모든 대상에로 자신의 정신을 돌이켜 다시 훑어보았는데, 그는 발견한 여러 원리를 가지고서 충분히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감히 말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이것들이 생전에 출판되는 데 대해서 결코 동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들이 일으킬 수 있는 반대나 논쟁, 혹은 이것들이 그에게 줄지도 모르는 명성이 자신을 교육하는 데 쓰려고 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의 반대 의견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도 유익하겠지만, 무릇 서로 이기려고 드는 논쟁에서는 상대방의 이유를 헤아리는 것보다는 그럴싸한 말들을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이 이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타인의 정신이 자신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논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의견으로 연구를 해나가는 사람은 흔치 않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만큼만 자연을 알기를 절실히 원하며, 난제가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으며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들의 철학하는 방식은 아주 편한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처럼 대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가장 날카롭고 유능한 사람에 대해서도 논파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눈 뜬 사람과 불리하지 않게 싸우기 위하여 그 눈 뜬 사람을 아주 컴컴한 동굴 깊숙이 끌어들이는 소경과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설에서 논의한 원리들은 동굴에 창을 몇 개 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박학하다는 명성을 얻으려면 이 창 하나를 내게 위해서 오랜 시간을 들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지적 허영보다 소수의 진리 인식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데카르트(Descartes)로서는 이 서설에서 이미 말한 것 외에 아무 것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데카르트(Descartes)가 이룩한 것보다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들은 데카르트(Descartes)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들 자신이 발견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고려가 함께 합쳐 데카르트(Descartes)는 3년 전 수중에 있던 논문을 세상에 내어 놓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다른 이유는 무수한 실험이 데카르트(Descartes)에게 필요하고, 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일에 만일 데카르트(Descartes)가 어떤 점에서 사람들의 계획에 기여할 수 있는지, 또한 책을 쓰지 않았을 때 훨씬 더 좋은 많은 것을 그들에게 남겨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난받을 만큼 스스로를 소홀히 여기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모두 세상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서 유능한 사람들을 더욱 발전하도록 장려하고, 또한 동참하도록 유도하여 그들도 자신이 배운 것을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 똑같이 시작하게 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가 흐르고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생애를 합치면 각자가 홀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방법서설의 의의와 영향

  「방법서설」은 주체적 자아의식으로서 이성을 강조한 근대철학의 시조로써, 고대 철학의 원리 탐구를 중심을 개별 항들의 관계 사이에서 법칙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무엇에서 어떻게로 사유방식을 전환했다. 또한 해석기하학의 시초가 되어, 미적분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동물 기계론은 행동 심리학, 인지발달 심리학에 영향을 주고, 근세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기초가 되었다. 데카르트(Descartes) 당대에만 해도 아직까지 스콜라 철학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로 데카르트(Descartes)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성에 의한 반성적, 논증적 사고는 누구도 중시하지도 않았다. 그의 합리주의 사상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통해 전통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과학 문명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인간에 의한 자연 정복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방법서설에 대한 고찰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Descartes)가 말하는 방법이란 논리학, 대수학, 분석기하에서 나온 방법으로서 마치 수학처럼 기본적이고 단순하고 체계적인 것에서부터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진리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을 뜻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그는 의심되는 지식들의 허위나 불확실한 부분을 제거하고, 확실하고 명증한 것들만을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단순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려해 보는 철학의 반성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방법에서 명증하게 인식하지 않은 것은 하나라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내용에서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예리하고도 비판적인 관점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야함은 물론일 것이다. 특히 이 명증하게 인식되지 않는 진리에는 감각에 의한 감각적 지식이 있는데, 데카르트(Descartes)의 합리론적 사고와 같이 입각해서 보자면 서로 매우 부합하는 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형이상학의 기본 전제를 감각으로부터 얻어진 경험적인 것으로 규명한다.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기본 전제가 경험적인 것을 토대로 하고 있음에서, 우리는 진리탐구의 첫 시작은 감각임을 알 수가 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방법적 회의관점에서는 아주 비판적인 태도이긴 하지만, 과연 가장 기본이 되는 감각을 부정함으로써, 습득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감각적인 부분을 인식의 대상으로 볼 수 없게 된다면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들게 된다. 즉 첫 번째 규칙에 의거하여 의심이 가고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해 나갈 수는 있으나 그러한 것들만 가지고는 세계를 이해하고 볼 수 있는 영역이 전체에 비해 매우 좁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데카르트(Descartes)는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항상 동일성을 가지기 때문에 진리는 직관적으로 진리임을 알 수 있어야 진리라고 한다. 허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 이외의 이질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즉 진리와 똑같지 않고,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소외당하는 것이다. 마치 흑백논리를 연상시켜 배타적인 느낌이 강하다. 진리는 반드시 동일성을 가지고, 단 하나만 존재해야 할까? 이러한 진리가 있다면, 또 다른 진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학살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고, 유대인들이 나치에 학살당한 이유역시 이러한 동일성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판명에 있어서도 과연 정확한 구분이 존재할까? 어떻게 보면 이는 차별을 낳게 되고, 구분되지 않는 존재는 비정상적인걸로 여겨져 억지로 그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날지 못하는 새인 타조나 닭을 보면, 명확하게 나누기에 사실 모호한 존재이다. 이런 존재들은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되는데 나누는 이유는 인간의 편의 때문이다. 만약 나누더라도 문제는 이러한 나누려는 태도는 애매모호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판명함을 따져 경계에 걸쳐 있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곧 폭력이 될 수 있고, 기회주의가 대두되어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에서는 검토대상을 가능한 한 부분들로 필요한 만큼 나누라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즉 세분화 시켜서 각 부분들을 명확한 지식들로 구축하라는 내용이다. 문제해결에 있어서 가장 작은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단계별로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기에 매우 좋은 방법이다. 이는 부분으로 쪼개어서 전체를 생각하는 기하학에서의 방법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세분화라는 것이 다양한 사물들의 속성에 다 적용 될지는 미지수이다. 즉, 간단하게 예를 들어서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과 정신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같은 속성의 측면에서 다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번째 규칙은 어떠한 대상을 필요한 부분들로 나눈다는 것은 어렵고 설사 나눈다 해도 입장에 따라서 부분들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Descartes)는 반대의 방법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한방향의 방법만 생각했기에, 합성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분석적이나 합성적인 한 가지 방향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둘을 조화시키는 학문법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세 번째의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부터 인식을 시작하는 것에서는 체계적인 순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순서를 마련해야 올바른 과학적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보면 원리는 그것을 접하는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이라고 나와있다. 빗대어 본다면 경험을 기초로한 ‘형이상학’과 비슷한 점이 있으므로, 데카르트(Descartes)의 방법도 어느정도 경험적인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감각적인 경험에서 오는 지식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네 번째는 완전한 열거와 검토를 통해서 신뢰가능한 지식이 습득될 때까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자신감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방법을 발견한 근대인의 자신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직접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자신이 제시한 방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열거와 검사로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제3부의 임시도덕이란 방법에 의하여 새로운 견해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에서 의존할 임시의 도덕격률을 뜻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격률에 대해서는 방향에 대해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정말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도 올바른 길만 쫓아간다면 올바른 길을 멀리하고서 달려가는 사람보다 더욱 많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방향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격률의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신의 견해가 아닌 덜 극단적이고 온건한 방식을 따르며 그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단호하게 따르라고 하고 있다. 아무리 이 도덕격률이 이성으로 하여금 판단을 내리지 말게끔 하는 과정에서의 격률일지라도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상시 판단하고 방향이 옳지 않을 경우에는 즉각 멈추고 적합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세 번째 격률은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순응하며, 개인의 한계를 받아들이라는 내용에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는 개인의 한계를 제한하고 자신의 욕구, 만족감을 억제하라는 내용이며 개인은 운명을 바꿀 수 없으며 세상을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개인이 최선을 다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 생각하여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설정하고 이에 욕망을 이 한계에 맞추어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행을 느끼지 말며 성취한 부분에 대해서는 행복을 느끼라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한계를 지녀 사회를 바꿀 수 없으며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개혁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주체에 따라서 달려 있는 상황이 다수인데 이 견해라면 인간의 개혁 능력, 사회를 바꿀 능력을 억제하여 자칫하면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 있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Descartes)의 임시도덕에 관한 부분은 여러관점에서 볼 때, 체계적인 방법으로 탐구되지 않은 것 같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도덕격률들은 어느정도 경험적인 요소를 포괄하는 체계이며 매우 가변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부정하던 요소들이 격률로써 존재할 수 있다. 특히나 두 번째의 격률에서, 그토록 의심이 많고 스스로가 인정한 진리만 습득하는 데카르트(Descartes)가 개연성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데카르트(Descartes)의 도덕이 경험적이고 잠정적이라고 해서 완전하게 경험에 관한 학은 아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Descartes)의 도덕원리는 이성의 최대사용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에 근거한 도덕이라는 점에서 단지 부정해야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순 없을 것 같다.
  제5부의 동물 기계론도 심도있게 다뤄줘야 할 부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데카르트(Descartes)가 이원론을 무조건적으로 고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정신과 육체가 결합되어 일체를 이루고는 있으나, 그 일체에서 나타나는 영혼을 참된 실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육체와 영혼이 이원론 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적 관점으로 자신의 영혼의 표현으로서 내어 놓고 있는 세계를 통하여 이원론을 판단하여야 한다. 그렇게 판단할 때 인간의 영혼에는 비물질적인 것이 있다고 보아질 것이다. 그러나 철학사에서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원론의 출현은 그 어떤 철학보다 더 시대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며, 현대 철학이나 생물학도 데카르트(Descartes)의 이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신 존재를 증명함에 있어서 본유관념이 바로 신이라고 정의해버리거나 신앙과 이성의 우위를 설명하면서 스스로 역설에 빠지는 등 후기의 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데카르트(Descartes)의 방법론적 회의의 시도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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