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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서평/감상문] 이중나선 The Double Helix

by 서풍광시곡 2020. 6. 25.

이중나선 The Double Helix

  1953년 4월 25일자󰡐네이처(Nature)󰡑지에는 DNA 이중구조를 설명하는 논문이 실렸다.  겨우 900단어에 불과한, 한 장 조금 넘는 분량의 논문을 실은 사람들은 왓슨과 크릭이라는 젊은 학자였다. 이들은 1951년에서 1953년까지 2년이란 시간동안 토론하고 논쟁하며 이중나선을 발견해내기까지 고민과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몰두했기에 DNA의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이들의 발견으로 생명과학의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들이 초석을 마련함으로 인해 인간의 편리함과 건강한 삶을 위한 생명과학 연구(줄기세포 연구, 각종 치료제 개발 등)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68년 처음 발간된󰡐이중나선(The Double Helix)󰡑은 제임스 왓슨이 1951년 자신이  처음 영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부터 1953년 봄󰡐Nature󰡑지에 논문을 실을 때까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각각 25세와 36세의 풋내기 과학자에 불과했던 왓슨과 크릭은 그런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서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점을 입증함과 동시에 유전물질로서 작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를 제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왓슨과 크릭은 DNA 구조 발견의 공로로 다른 한 사람의 조력자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35세의 크릭은 무명의 과학자였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지만 불합리한 논리나 잘못된  결론에 대해 비수를 꽂듯이 논쟁하는 성격의 소유자 이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실력 있는 과학자이기보단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수다꾼 취급을 하고 있었다. 크릭은 DNA연구 분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진행하고 있던 연구를 접기에 여의치 않았다. 또    그 당시 영국에서 DNA에 관한 연구는 런던 킹스대학의 모리스 윌킨스가 독점하고 있었기에 그 분야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무렵 왓슨은 그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였던 살바도르 루리아에 의해 이중나선을 발견하게 되는 위대한 업적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비록 루리아는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될 목적으로 왓슨에게 화학공부를 시키려 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는 루리아가 왓슨 코펜하겐으로 보낸 것으로 인해, 그가 칼 카르를 만나고 칼  카르와 함께 간 나폴리에서 우연치 않게 윌킨스를 만나게 되어 DNA의 X선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윌킨스의 DNA X선회절상을 잊지 못하던 그에게 라이너스 폴링의 α나선모형에 관한 논문은 DNA에 대한 흥미를 더하게 되어 왓슨은 결국 막스 페루츠와 존 켄드루가 있는 캠브리지 대학교으로 옮겨가게 된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의 공동연구자인 크릭을 만난 것이다(사실 왓슨과 크릭이 함께 연구하게 된 것은 몇 시간씩 떠들어대는 두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기피대상으로 지목해 한 연구실에 몰아넣었기 때문이라    한다).그리하여 왓슨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DNA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연구하고자 하였던 크릭을 만나게 되었다. 
  왓슨과 크릭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DNA의 구조에 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DNA가 폴리뉴클레오티드 사슬이 서로 꼬여서 형성된 복합나선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하지만 나선구조를 밝히려면 사슬들이 서로 붙들고 있는 힘이 수소결합인지 아니면 음전하를 띤 인산기가 관여하는 결합인지 알아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 뉴클레오티드에 있는 염기의 배열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였다. 이러한 DNA의 구조를 밝히는데 있어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연구하고 있는 X선회절법에 의한 사진을 판독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프랭클린과 윌킨스 그 둘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로 인해 그것은 좀처럼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로지의 DNA 나선구조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도 걸림돌이 되었다.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관계는 그 뒤로도 회복되지 않고 계속 나빠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이 윌킨스가 왓슨과 크릭의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된다. 프랭클린이 촬영한 DNA X선회절법 사진인 A형 사진, B형 사진 등의 연구 자료를 그녀의 허락 없이 윌킨스가 왓슨에게 무단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찍은 DNA 분자의 X선 회절사진 패턴에 적합하게   설명할 수 있는 DNA 입체 구조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당대 최고의 화학자 폴링에 의해 밝혀진 단백질의 알파 나선 구조에서 힌트를 얻어 DNA 분자도 질서 정연한 나선구조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폴링처럼 실제 모형으로 나선구조를 만들어보기 시작하는데 그 나선이 세가닥의 사슬모양이라는 곳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이  화학적으로 맞지 않는 형태이며 맞물려 돌아갈 수 없는 불완전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러 번의 좌절과 실패를 거듭한 결과, 하나하나의 사슬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고 그 두 사슬이 다시 서로 감겨 있어서 마치 새끼줄처럼 이중 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론이 프랭클린이 촬영한 DNA X선회절법 사진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므로 그들이 드디어 DNA의 구조를 발견해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중 나선 구조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중요한 정보는 샤가프가 전에 발표한 염기 함량비에 관한 데이터였다. “샤가프의 법칙”이라 하는 이것은 DNA를 재료로 4종의 염기 함량을 정밀히 조사한 결과, 아데닌의 양은 티민의 양과 같고, 구아닌의 양은 시토신의 양과 항상 같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로써 A-A, T-T, C-C, G-G 의 모양의 불완전한 이중나선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A-T, G-C의 염기적 상보관계를 이루는 이중나선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그들의 뛰어난 능력과 열정-왓슨과 크릭
  풋내기 생물학자 왓슨은 무명이나 다름없는 물리학자 크릭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만나 DNA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DNA 연구는 영국의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등의 쟁쟁한 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참인 왓슨과 크릭이 그런 대단한 사람들과 겨뤄 먼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왓슨이 미국인 특유의 자유롭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크릭은 천성적인 수다꾼이기는 하지만 보다 신중하고 논리적이다. 왓슨이 생화학자로서 교육을 받은 데 반해   크릭은 X선결정학을 연구하는, 크릭과는 전혀 다른 물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저명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쓴󰡐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일찍부터 유전물질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똑같은 목표에 주목  해서 함께 나아갔으며, 젊은 연구자로서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주변 사람에게 받아들이는데 있어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들이 연구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젊은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지와 순발력, 상상력 넘치는 아이디어의 조합 아니었을까? 이들도 다른 학자들 처럼 여러 가지 이론을 확립하는 데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DNA가 이중나선인가? 아니면 삼중나선인가? 염기쌍의 결합이 같은 염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나? 아니면 다른 염기들과 결합하나?...) 하지만 이들은 실수를 발견해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고 매진하는 열정, 중요한 문제를 집어내는 통찰력, 남들과는 다른 각도로 생각하고 해결 하는 능력...두 사람은 2년이란 시간동안 마치 이중나선이 꼬이는 듯한 절묘한 팀웍으로  답을 찾아낸 것이다. 

․교만과 그 결과-샤가프
  책 중반 즈음에 나오는 샤가프는 아데닌(A) 분자수와 티민(T)의 분자수, 구아닌(G) 분자수와 시토신(C)의 분자수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아낸 학자로,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책을 통해서   보아도 불쾌할 정도이다(크릭이 염기 4종류의 화학구조 차이를 기억하지 못하자 아예 대놓고 무시해 버리는 샤가프의 행동은 학자적 자질이 의심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왓슨과 크릭은 개의치 않고 연구에 매진하였다(아마도 질투심과 경쟁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보다 한발 앞서 있었던 많은 학자들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최고”라는 유아독존식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와 토론, 비판과 견제를 통해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창조적 사고의 원천인 듯 하다.

․숨은 공로자-로잘린드 프랭클린
 ※이 책에 자세히 나와있진 않지만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발견의 공로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습니다.

  왓슨과 크릭이 함께 일한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연구소는 DNA구조연구의 후발주자였다. 2차대전후 물자가 부족했던 영국에선 두 개의 대학이 같은 연구를 하는 것이 용납  되지 않았고 DNA 구조 연구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속한 킹스 대학 몫이었다.

  하지만 프랭클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킹스 대학의 동료 모리스 윌킨스는 수시로 캐번디시연구소를 방문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보여주고, 논문으로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제공했다. 더욱이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연구비 지원기관에 비공개로 제출한 보고서를 은밀히 입수하기까지 했다.

  물론 왓슨과 크릭에겐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DNA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던 실험데이터는 프랭클린의 것이었다(왓슨과 크릭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프랭클린은 여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학에서 과학을 연구했다(남성 위주의 당시 과학계는 그녀를 그들만의 토론에 끼워주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당당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프랭클린 자신은 데이터를 도용당한 것보다 연구할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실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그녀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도 여성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생전에 자신의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  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고, 과학자로서 후대에 남길 업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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