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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식정보시대의 삶과 윤리

by 서풍광시곡 2020. 9. 5.

●아름다운 라다크 공동체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라다크는 해발 3000∼4300미터나 되는 높은 지역인데, 여기 사람들은 험준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려 하기보다 순응하며 살아간다. 연중 반 이상 눈에 덮여 있고 나머지는 건조하고 먼지 많은 날씨다. 이런 극단의 날씨와 척박한 땅에서 작물을 기를 수 있는 때는 몇 달 안 되며 짐승도 살 수 없고 물도 귀하다. 그러나 라다크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소규모 농사로 거의 완전한 자립을 유지했다. 
 
 라다크 사람들은 씨 뿌리고 물을 대고 추수하는 모든 일에서 땅과 물이 조화를 이루도록 애썼다. 삽질이나 돌 깨기, 땅 위를 그냥 걷는 것조차 흙 속에 있는 벌레들과 개울에 사는 물고기, 땅에 있는 영혼들을 어지럽힐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그냥 내버리지 않았다.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은 짐승에게 주고 땔감으로 못 쓰면 땅에 거름이 되도록 한다. 집에서 짜서 만든 옷은 끝까지 기워 입는다. 옷이 너무 낡아 바느질도 할 수 없을 때는 진흙에 뭉쳐서 수로의 약한 부분을 막는 데 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재순환시키면서 소금과 차, 연장을 만드는 금속류 한 두 가지만 바깥 세계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단순한 연장밖에 없으므로 일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 양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손으로 털을 깎고, 씻고, 물레질해서 옷을 만드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을 천천히 느리게 하기 때문에 여든 살 노인도 어린아이도 함께 일한다. 서구 산업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효율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낮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서구 사회가 산업 문명을 이루는 대신 자기도 모르게 망가뜨리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가치들이 라다크에는 훌륭하게 살아 있다. 생산이든 사회든 극도로 분화되어 물건의 용도를 극히 편협하게 제한하고 모든 것을 순식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에서는 사람의 값어치마저 홀대당한다. 그러나 라다크에서는 사물이 제 값을 남김없이 다하는 것과 같이, 나이가 들었다고 쓸모 없는 노인 취급을 당하는 법이 없다. 
 또한, 라다크에서는 이렇게 어린 아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섞여 누구도 처지지 않고 모든 일에 참여하면서 산다. 그 속에서 나이 든 아이는 더 어린 아이에게 자연스레 책임감을 느끼고, 어린 아이는 큰 아이를 보고 따라 하며 존경한다. 노인의 경험과 지혜는 공동체 안에서 소중한 가르침으로 존중받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기에, 인생의 의미를 회의하거나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끼거나 세상보다 뒤처졌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없다. 
 
 우리 사회는 어디 그런가. 나를 남과 견주고, 우리를 다른 나라와 견주면서 끊임없이 주눅들고, 시기하고, 터무니없는 오기를 부려 자기를 들볶고, 뒤처지는 느낌에 안달하지는 않는가. 라다크 사회가 지켜 온 자립과 배려와 자기 존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나 일체감은 지금 우리가 아무리 꿈꿔도 얻기 어렵게 되어 있다.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오래된 미래』는 이념에만 함몰되어 있던 나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을 일깨워준 책이다. 
자본 또는 섹슈얼리티 그 이외의 방법으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은 세계화이다. 세계화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고 어떻게 우리의 전통을 파괴해서 인간을 황폐화하는지 라다크라는 마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서구에서 시작된 진보라는 개념도 일종의 서구적 가치에 기반한 이질적인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라다크 마을은 불교에 바탕을 둔 농업중심적인 마을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노동이 아니다. 삶 그 자체이다.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삶이다. 외부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삶은 매우 고되게 보인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미개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 마을은 성별분업적인 사회다. 또한, 일처다부제의 사회다. 그들에게는 성별은 권력관계가 아니라 숙명적 차이일 뿐이다.

 모든 발전이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발전을 자기들에게도 맞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서구의 성과는 그들 역사의 발전의 산물로서 존재한다. 이질적인 역사적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비서구국가에서는 그것들이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민주주의까지도 말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상식'일지 모른다. 개개의 상황에 따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연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식 말이다. 옳다는 것은 상식적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화는 서구의 상식만을 유일한 진리로 설정하고 전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가치속으로 끌어들이려한다. 경제적인 것부터 문화적인 것까지 톱니바퀴의 한 부분으로서 지역을 종속화한다. 자원의 편재성. 물론 지구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자원이 고루 분포되어 있지 않다. 어느나라에는 풍족한 것이 어느나라에는 부족한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가 어떤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도 우리는 살고 있었다.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세계화는 그것을 부정한다. 우리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세계화를 외치기 전까지 조상들이 축적해온 경험들은 쓸모없다고 말한다. 세계인구의 1/3이 2/3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지금, 그들은 나머지 2/3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요구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나라와 상황이 너무 비슷하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도 서양 문물이 들어오기 전 전통적인 조화 사상을 바탕으로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두레'라는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라다크 사람들 또한 서로 협력하며 오손도손 살아가던 시절을 지우고 이제는 돈이 최고라며 돈을 받아야 겨우 도와 주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우리 나라도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돈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자신을 버리고, 종이 조각에 미치지 않는 돈에 혈안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망각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후,  사는 세상과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았다. 공부 시간에도 한 손으로 가리며, 쓰레기를 바닥에 그냥 버리고, 수도꼭지를 제대로 잠그지도 않는다. 밝은 미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우리 주위엔 흔치 않다.

 좀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화장실 가기가 자연에게 너무 미안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배설물을 버리지 않고 밭이나 논에 뿌려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즘은 맑은 물을 그냥 막 쓸어 보내고, 제대로 정화하지도 않는다. 그런 물을 지금 우리가 마시며 피부에 대고 씻는다. 이런것들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잘 생각해 보자. 언제부턴가 '금수강산'이라던 말이 우리 나라에서 듣기 힘든 말이 되어버렸다.
 우리 나라도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키워야 한다. 환경에 관해서도 위대함과 고마움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 자신만 잘 살겠다며 공동체의 일에 무관심하다면 결국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사회 발전의 새로운 대안
 
 이 아름다운 사회가 뿌리까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1974년 인도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문을 열면서 세계화와 산업화 물결을 타게 되었다. 관광과 정치의 요구 때문에 강요된 변화를 겪으면서 공동체가 크게 흔들렸다.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는 분열됐으며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생겼다. 변하는 경제는 농부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개발의 힘에 떠밀려 수출용 작물을 재배하면서 화학 비료나 살충제를 대량으로 쓰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농사일이나마 줄어들어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다. 라다크 사람들은 이제 도시 변두리에서 쓰레기와 세제로 오염된 시냇물과 함께, 살아가는 데 아무 소용도 안 되는 교육을 받으면서 힘겹게 살아가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모든 전통 사회가 산업 문명에 의해 망가져 온 과정의 되풀이다. 우리도 역시 비슷하게 지나왔으므로,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사는 모습이 달라지면서 라다크 사람들이 엄청난 문화적 열등감을 갖게 된 것이다. 마음이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던 사람들이 생활고와 심리적 압박감으로 급속히 자존심을 잃고 자기네 전통과 생활 방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를 처음 찾은 때는 1975년이다. 인도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을 처음 받아들인 때, 지은이는 동양언어학 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곳에 왔다. 노르베리-호지는 일 년 만에 라다크 말을 익히고 라다크 전통 문화와 자급 자족 생활을 이해하면서 그 뒤 16년간 거기 눌러 살았다. 글쓴이는 라다크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가 망가지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고 라다크의 앞날을 함께 고민했다. 
개발은 곧 파괴인가? 전통 사회가 새로운 사회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사회는 아니었다. 라다크 사람들이 오랜 세월 누려 온 사회적·생태적 균형을 잃지 않고 생활 수준을 높일 수는 없는가? 그러려면 자신들이 가진 오래된 토대를 바탕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이 책의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반(反)개발'이라는 사회 발전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 반개발'은 먼저 사람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선택하게 한다. 세계 여러 곳에서 좀더 지속 가능한 대안을 탐색하고 수많은 지역 운동을 부각시키려 한다. 
 
 글쓴이는 라다크 사람들과 함께 1980년 '라다크 프로젝트'라는 국제 조직을 만들고 1983년 '라다크의 생태적 발전을 위한 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은 실제 라다크에서 태양 에너지 등을 이용한 '적정기술'의 여러 실험을 성공하여 보여 준다. 또 '생태적 발전 센터'를 세워 지역의 자립을 돕고 생태적 개발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 전역에 걸쳐 서구의 이해 관계는 뒤늦게 산업화로 나아가는 사회들이 자기 지역의 토착 환경을 바탕으로 개발하려는 것을 가로막는다. 실제 삶은 매우 복잡하며 뜻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아직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은 자신들이 살아 온 바탕을 분별 없이 무너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착각하는 오늘날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라다크의 집단은 '만물'이다 

 얼마전 읽은 최준식 교수의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가 '한국인의 부정적인 집단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라면, 난 이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의 긍정적인 집단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하고 싶다. (물론 라다크 사람들의 정신은 '집단주의'라는 말보다 '공동체정신'에 더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집단과 라다크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짚어보고 싶어서 편의상 집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집단이 얼마나 나누어져있는지, 집단 내에서도 또 작은 집단이 존재한다. 게다가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한 활동과 생활을 목적으로 하고, 더 이상 이익을 생산할 가치가 사라지면 그 즉시 사람들은 그 집단에 대한 열정을 접어버린다. 우리는 간사해서, 학교와 학교 간 경쟁이 붙었을 땐 자기 학교 편이 되었다가, 그 학교 내에서 그룹끼리 경쟁이 붙으면 바로 자기가 속한 그룹의 편이 되었다가, 그 그룹의 사람들끼리 마찰이 생기면 자기가 조금 더 친한 사람의 편이 된다. 
 그러나 라다크의 집단은 결코 협소하지 않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을 자신들의 집단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듯 하다. 아랫마을을 위해 윗마을 사람들은 냇가에서 빨래를 하지 않는다. 냇가에서 빨래하면 안된다는 것을 라다크의 어린 꼬마들도 알고 있고, 또 왜 그래야하는지까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은 분명 각각 따로 살아가는 집단인 것 같지만 라다크사람들에겐 오로지 하나의 집단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는 라다크 사람들은 마찰이 빚어진 문제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배려와 신뢰'로 감싸안는 모습을 보인다. 잘못은 했지만 그것이 고의가 아니라면 피해를 입은 사람도 이해하고, 어떤 물건을  쓸 순서인데 다른 사람이 먼저 쓴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보다 급했기 때문에 먼저 썼을 거라는 배려심이 앞선다. 이런 모습들은 나무는 눈에 보이는 나무만 나무가 아니라, 그 나무가 존재하게끔 돕는 모든 것이 나무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라다크인들의 불교관과 일치한다. 
  부끄러웠다. 친구들이 주위 사람들과의 갈등을 고민하다가 내게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  으레껏 "신경쓰지마.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너는 너야. 너만 잘하면 되지."라고 친구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라다크의 발전은 '퇴보' 

  고백한다.  사람들 앞에서 짓는 미소 뒤에는 질투, 불만이 들어있을 때가 굉장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라다크 사람들이 책의 저자인 헬레나에게 보인 태도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진실된 태도였음을 깨닫는 순간  다시한 번 부끄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웃음 속에 행복함과 기쁨만을 담았던 라다크 사람들은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절대로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고 갓난 아이가 플라스틱 병에 담긴 소젖을 먹는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랬던 라다크인들이 개발로 인한 서구화로 자신들의 전통을 부끄러워하고 하찮게 여긴다는 소식은 나에게도 슬픈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이기적인 사회속에서는 더 이상 진실된 미소를 지을 수 없을 것 같아 언젠가라도 라다크인들을 만나 그들의 미소를 눈에 담아보기라고 할 수 있다면, 하고 가슴이 잔뜩 부풀어있었기 때문이다. 

 라다크인들이 콘크리트 벽 안에 갇혀 '나 자신'이 존재하도록 돕고 있는 태양과 바람과 산, 들, 물 등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니! 영화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짓는 거짓된 미소를 동경하고 있다니! 아아,  그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다. 그 전에  서구의 개발자들을 증오한다. 자신들의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라다크인들을 탐욕스럽게 만들 작전을 세운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감히 때묻지 않은 눈동자에 자신들의 '때'를 '깨끗한 것'인 냥 묻혀놓고는 으스댄 꼴을 생각만해도 답답하고 아까워서 진정이 되지 않는다. 

● 라다크의 발전은 '진보'가 아니라 '후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던 라다크인들마저 불행해졌다. 가족을 위해 일해야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의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고, 협소한 집단주의에 갇혀 자신들의 문화만이 우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 밑에서 일하며 돈을 번다. 자급하던 시대에는 풍부하기만 했던 그들의 지속가능한 자원이 쓸모없어져 버렸고, 화려한 광고에 소유욕을 가지게 되어 있는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산다. 가지고 있는데도 못 가진 것 같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그들은 이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어디에도 라다크를 알 수 있는 문화가 남아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어린 아이가 말했다. 라다크만이 갖고 있던 고유의 문화를 잃은 채,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문화와 제도에 맞추어야 하는 삶은 라다크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편리한 물질의 이용이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만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라다크의 과거를 그저 하찮고 더럽고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믿게 된 것은 결코 진보라고 볼 수 없다. 아주 슬픈 퇴보다. 

 그러나 책 제목, '오래된 미래'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가 가지고 있는 가치에 거는 단단한 믿음이다. 
초등학교에서 상상화그리기 대회가 열릴 때 나도 참가를 여러 번 했다. 참가자 모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최첨단 시설을 그리며 경쟁했다. 보다 더 편리하고, 보다 더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그림으로 누가 더 세련되게 표현하느냐는 것이 그 대회의 심사 기준의 전부였다고 봐도 된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왜 미래의 모습은 꼭 첨단화된 세상일 것처럼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상상화그리기'인데 모두의 상상이 같았다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완전한 유토피아라고 느꼈던 라다크의 모습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되었지만, 그 과거야말로 앞으로의 미래가 되어야 함이 옳다.  미래의 세상이 라다크같은 세상이 되기를 기대하고 꿈꾼다. 그리고, 상상화그리기 대회의 대상작에 라다크와 같은 아름다운 공간을 그린 작품이 선정되는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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