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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코뮨 : 20년 이후 레포트

by 서풍광시곡 2020. 9. 24.

광주코뮨 : 20년 이후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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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코뮨 : 20년 이후

광주봉기가 그러한 주장들과 모순되므로, 광주봉기에 관한 얘기가 아직 미국에서 널리 얘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한국 군대에서 일부...

광주봉기가 그러한 주장들과 모순되므로, 광주봉기에 관한 얘기가 아직 미국에서 널리 얘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한국 군대에서 일부 분자들이 1980년 초에 정부의 통제력을 장악했을 때, 처음으로 터져 나온 항의는 진보적 정치의 심장부 - 광주가 주요도시인 전라남도지방 - 이외에서는 진정되었다. 5월 14일, 광주에 있는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대학을 봉쇄하고 있는 폭동진압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학생들이 도시로 진입했을 때, 주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즉각 학생들과 결합하였다. 5월 16일, 광주에 있는 9개 대학 학생들은 도청앞 광장에 집결한 뒤 횃불 행렬을 이루어 도시를 행진하였다. 다음날 보안사 요원과 경찰이 시 전역에 걸쳐 활동가들의 집을 급습하여 운동지도부를 체포하였다. 어떤 사람이 표현하듯이, `운동 수뇌부는 마비되었다.`

미국의 승인 하에 정부는 자신의 가장 잘 훈련된 공수대원들의 일부를 비무장지대의 전선에서 빼냈다. 이 공수대원들은 광주에 도착하자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주민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5월 18일 아침의 첫 번째 대결에서 무방비의 학생들의 몸은 특수용 곤봉으로 부러졌다. 한 병사는 자신의 총검으로 한 여성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나서,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이것이 내가 (베트남에서) 40명의 베트콩 계집들의 젖가슴을 도려낸 총검이다!` 그러한 잔인한 장면을 목격한 한 어린이는 부모에게 `우리 군대는 언제 와요?`라고 물었다. 민감한 나이에 정치적 가치를 배운 다른 어린이는 `공산당이 군대를 장악했다(인민군이 내려 왔다)`고 소리쳤다. 전 주민은 공수부대의 과잉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전 시가지가 군대에 대항하여 움직일 때, 경찰증원대가 도착하여 경찰 수는 1만8천명이 되었다. 민중들이 계속 저항하자 공수대원들은 다시 한번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고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였다. 다쳐서 피흘리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택시운전사들과 버스기사들까지 총검에 찔리고 구타당하고 종종 살해당했다. 결국 5월 20일 수만 명이 잔인한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집결하였다. 그날 저녁 아홉 대의 버스와 200대 이상의 택시들이 시내 상가인 금남로에서 시위행진을 앞장서 이끌었다. 노동자들, 학생들, 온갖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 거대한 군중이, 75만 명의 인구를 지닌 도시에서 한 때 20만 명이 넘게 불어났다. 그러나 군대가 발포하여 수십 명을 죽이고 500여 명을 다치게 하자 거리에서의 즐거운 느낌[축제분위기]은 잠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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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정보]

문서분량 : 5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광주코뮨 : 20년 이후
파일이름 : 광주코뮨 20년 이후.hwp
키워드 : 광주코뮨,:,20년,이후
자료No(pk) : 16066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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