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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세종대왕의 애민 정치 - 훈민정음

by 서풍광시곡 2020. 9. 12.

세종대왕의 애민 정치

세종대왕은 부친 이방원의 셋째아들 이름은 이도

12세에 (충녕군)으로 책봉되고 4년뒤 (충녕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그의 자는 원정이고 시호는 장헌 묘호는 세종이다.

세종대왕시기를 “세종장헌대왕실록”이라 고 칭함

세종은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우리역사에서 자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대왕은 우리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고 역사는 전해 오고 있다.

세종대왕의 애민 정치는 여러 면에서 많이 나타난다.
우선 훈민정음의 재정을 꼽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세종최대의 업적이면서 우리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청제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세종단독 작품인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작업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계속 되고 있다. 엄청난 반대를 예상한 세종이 비밀리에 작업한 일이기에 그럴 것 이다. 

“단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되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 으로 변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는 세종의 말과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라고 훈민정음 서문에 정인지가 쓴 글을 종합하여 훈민정음 창제의 실제 목적을 짐작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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